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문단 편집) === 리비우스 가 ===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정인, 리비우스 씨족은 공화정 시대부터 수많은 집정관, 법무관, 원로원 의원을 배출한, 로마의 [[노빌레스]]이다. 이들은 공화정 초기부터 [[파트리키]]와 어깨를 나란히 한 명문가이다. 로마 공화정을 기준으로 공화정 초기부터 8명의 집정관, 2명의 감찰관, 1명의 독재관, 3번의 개선식, 1명의 치안판사를 배출한 가문이다. 씨족 성씨 리비우스의 뜻은 [[청회색]] 혹은 푸른 납을 뜻한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다만, 에트루리아어에서 유래한 라틴어 중 하나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따라서 건국 초부터 유명한 평민귀족임에도 라틴계, 에트루리아계 중 어느 혈통인지는 주장이 갈린다. 리비우스 일족 가문 중 가장 위세를 떨친 지파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이다. 이 가문은 리비우스 일족의 여러 지파 중 덴토르 가문에서 다시 갈라진 집안이다. 기원전 390년 집정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덴토르의 아들인 마르쿠스 리비우스는 적들을 쫓아 빼앗긴 재물을 되찾았다. 이때 그는 갈리아족의 용감한 족장 드라우수스에게 정당한 룰 아래 공평하게 칼과 방패만 가지고 [[일기토]]를 벌여, 그에게 항복을 받고 죽였다. 그러면서 드라우수스에게 약속한 그대로 상대인 그의 용맹함을 기린 뜻에서 변형한 드루수스를 가문의 성씨로 취했다. 이 가문은 일찍이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에게 여러 남성을 입양으로 보냈고, 이런 배경 때문에 스크리보니우스 일족 중 '리보(Libo)'를 지파 성씨로 취한 리보 가문이 탄생했다. 이와 함께 이 가문은 [[플레브스]]들이 집정관에 오를 때부터 이름을 떨치면서, 일찍이 아이밀리우스 가문과 통혼한 역사가 깊었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은 [[한니발 바르카]]와 벌인 2차 포에니 전쟁 아래 가문 남성들 중 대를 이을 사람이 거의 없게 될 정도가 됐다. 따라서 일찍부터 통혼을 통해 서로 친인척이었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 남자 아이를 입양했다. 그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인데, 그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형제였다. 그는 형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만큼 유명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혈연상 사촌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임페리움 문제 등으로 관계가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은 사실상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과 사실상 한 몸이었고, 일찍부터 그라쿠스 형제의 정책에 반대의사가 명확한 노빌레스였다. 그 이유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이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레피두스 두 가문과 서로 아들을 입양보내거나, 딸을 시집보내면서, 사실상 한 가문으로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리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차남이 BC 112년에 집정관을 지낸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이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혈통적으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 사람으로 어머니는 코르넬리우스 가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서 기본적으로 완고하고, 비판적이었다. 특히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는 정적이었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대립해 그를 제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반대했지만, 정작 그 아들인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동맹시 전쟁 직전 이탈리아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보수파에게 암살되었다.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아들이 없었다. 그는 친형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의 아들들 대신,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에 시집간 누나의 어린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그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였다. 그는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였는데, 법적 양아버지이자 혈연상 외삼촌인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달리 보수적인 원로원파 멤버였다. 그는 또 다른 외삼촌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와 달리 온건한 면이 적고 고지식했다. 그래서 그는 카이사르와 2차 삼두정 모두를 격렬하게 반대했고,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진군 직후 그리스로 피신한 뒤, 필리피 전투에 직접 참전해 싸웠다, 하지만 2차전에서 패배한 이후 동료 의원들과는 달리 항복을 거부하고 자결했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에게는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오빠로 아버지보다는 온건한 옵티마테스였다. 그는 내전 기간에 죽었는데, 일찍 결혼해 리비아 풀크라, 리비아 리빌라라는 두 딸 외엔 가문을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아누스는 아주 일찍이 본래 혈연적으로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사람인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에서 자신과 혈연상 친척인 소년을 양자를 구해, 본인의 상속자이자 죽은 아들의 동생이며 양자로 입적시켜 키웠다. 그가 바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동생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였다. 드루수스 리보의 친고모는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부인인 스크리보니아(대 율리아의 친모)였고, 친부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장인이었던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소년 시절부터 누나 리비아 드루실라와 매형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으며, 조카 티베리우스 시대에는 모함을 받았다가 티베리우스에게 보호를 받고 이 사람을 모함한 인사가 역으로 반역죄로 기소돼 처형되었다. 또한 드루수스 리보는 훗날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의 첫 번째 결혼 상대자였지만, 결혼식 당일 갑자기 사망한 리비아 메둘리나 카밀라의 아버지로도 추정되고 있다. 한편, 리비우스 가문 중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딸(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여동생) 리비아 드루사는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처음 결혼해 [[세르빌리아]](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카이사르의 정부)를 낳았고, 카토와 재혼하여 소(小) 카토를 낳았다. 세르빌리아는 브루투스(카이사르의 암살자)와 유니아 세쿤다(카이사르의 암살자인 카시우스와 결혼), 유니아 프리마(제 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레피두스와 결혼)를 낳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